스테이블코인·프로그래머블 머니·AI Agent 결제가 여는 온체인 금융 인프라
2026-07-02
요즘 디지털자산을 둘러싼 이야기를 들으면, 예전과는 결이 꽤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한동안 시장의 관심은 어떤 코인이 오를지, 비트코인이 어디까지 갈지, 제도권 편입이 얼마나 빨라질지 같은 질문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조금 더 구조적인 이야기가 많아졌다. “무엇이 오르느냐”보다 “앞으로 금융이 어떤 인프라 위에서 돌아가게 되느냐”가 더 중요한 질문처럼 들린다.
한국경제신문 초청으로 다녀온 2026 디지털자산 투자 인사이트 포럼도 바로 그 변화를 강하게 보여준 자리였다. 현장에서 반복해서 들린 키워드는 다음 다섯 가지였다.
- 스테이블코인
- 온체인
- 프로그래머블 머니
- AI Agent 결제
- Super Wallet
각각 따로 보면 익숙한 단어들일 수 있지만, 한 흐름 안에서 이어서 보면 꽤 선명한 그림이 나온다. 미래 금융의 경쟁은 더 이상 "누가 더 좋은 코인을 만드느냐"에 있지 않고, 누가 온체인 금융 인프라와 소비자 접점을 먼저 장악하느냐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이제 ‘코인’보다 ‘결제망’에 가깝다
이번 포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지점 중 하나는 스테이블코인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였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스테이블코인을 디지털자산의 한 종류, 혹은 거래소에서 쓰는 보조 수단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훨씬 더 넓은 의미의 금융 인프라로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반복됐다.
이 관점이 중요한 이유는 스테이블코인의 본질이 가격 상승 기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핵심은 빠르고 저렴하게 가치를 이동시키는 능력이다. 특히 글로벌 결제와 정산에서는 이 장점이 더 크게 드러나는데, 다음과 같은 영역에서는 기존 금융망보다 더 유연하고 실시간에 가까운 구조를 만들 수 있다.
- 국가 간 송금
- 기업 간 대금 정산
- 플랫폼 내부 결제
- 토큰화 자산 거래
아르헨티나처럼 인플레이션이 심한 국가에서 스테이블코인이 실생활의 대체 통화처럼 기능한다.
이 사례는 스테이블코인이 단순한 투자 상품이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화폐 가치가 흔들리는 환경에서는 "디지털자산"이라는 말보다 "가치 보존 수단" 혹은 "실용적인 결제 수단"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 흐름이 더 이상 크립토 업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Visa, Mastercard, PayPal 같은 기존 결제 기업들이 이미 스테이블코인 인프라를 전략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가 크다. 새로운 플레이어가 기존 질서를 흔드는 구도라기보다, 기존 결제 네트워크 자체가 다음 세대 인프라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결국 앞으로의 경쟁은 어떤 스테이블코인이 더 유명하냐보다 다음 질문들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
- 어떤 지갑에서 자연스럽게 쓰이느냐
- 어떤 결제망과 연결되느냐
- 어떤 규제를 통과했느냐
- 사용자가 그 존재를 의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매끄럽게 녹아드느냐
돈이 ‘보내는 것’에서 ‘실행되는 것’으로 바뀐다
프로그래머블 머니라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이번에는 그 개념이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쉽게 말하면 돈이 단순히 이동하는 수단이 아니라, 조건이 충족되면 스스로 실행되는 구조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기존 금융에도 자동이체나 예약송금 같은 기능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정 금융기관의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제한된 자동화였다. 반면 프로그래머블 머니는 계약, 정산, 상환, 투자 같은 금융 행위 자체를 더 넓은 환경에서 자동으로 연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 배송이 완료되면 판매자에게 자동 정산이 이뤄진다
- 매출이 발생하면 대출금 일부가 자동 상환된다
- 포트폴리오 비중이 기준에서 벗어나면 자동으로 리밸런싱이 실행된다
- 계약 조건이 충족되면 별도의 승인 절차 없이 지급이 이뤄진다
이쯤 되면 돈은 더 이상 사람이 일일이 지시해서 움직이는 대상이 아니라, 서비스의 규칙과 흐름에 따라 작동하는 기능에 가까워진다.
이 변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금융의 존재감이 오히려 약해진다는 데 있다. 보통 새로운 금융 기술을 떠올리면 더 많은 앱, 더 많은 화면, 더 많은 선택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프로그래머블 머니가 지향하는 방향은 반대다. 금융이 전면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 뒤로 숨어든다. 사람들은 “결제한다”는 감각 없이 결제를 경험하고, “상환한다”는 의식 없이 현금흐름에 맞춘 상환을 하게 된다.
이런 변화는 결국 금융의 배경화를 뜻한다. 금융이 별도의 행위가 아니라 제품과 서비스 안에 녹아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온체인 인프라는 단순한 기술 선택지가 아니라, 자동화된 금융을 가능하게 하는 운영체제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AI Agent가 결제까지 맡게 되면 필요한 것은 ‘생각하는 돈’이다
AI 이야기는 이제 거의 모든 산업에서 빠지지 않지만, 금융과 연결될 때는 조금 다른 차원의 질문이 생긴다. AI가 추천을 잘하는 것과 실제로 경제활동을 수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가령 AI 비서에게 “이번 출장 예산 안에서 가장 합리적인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해줘”라고 말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여기서 AI는 단순히 정보를 찾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가격을 비교하고, 조건을 판단하고, 구매를 실행하고, 결제와 정산까지 마무리해야 한다. 즉 탐색과 의사결정뿐 아니라 실제 돈의 이동까지 책임져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 카드 결제나 은행 이체 구조는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 사람의 인증과 승인, 국가별 결제망, 복잡한 정산 절차를 전제로 설계된 시스템은 AI가 실시간으로 자율적 거래를 수행하는 환경과 잘 맞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스테이블코인과 스마트컨트랙트, 그리고 프로그래머블 머니는 AI가 조건 기반으로 거래를 실행할 수 있는 구조를 제공한다.
이 말은 조금 과장하면, AI 시대에는 AI가 쓸 수 있는 돈이 따로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단순히 디지털 형태의 돈이 아니라, 권한을 세밀하게 나누고, 조건을 걸고, 거래 결과에 따라 자동으로 정산할 수 있는 돈 말이다. Autonomous Finance라는 표현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기에는 보안과 통제의 문제가 따라온다.
- AI에게 어디까지 결제 권한을 줄 것인지
- 예산 한도는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 잘못된 판단이나 악성 행위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
같은 질문은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AI Agent가 실제 경제활동의 주체로 등장하는 순간 금융 인프라도 함께 바뀔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금융의 중심은 계좌에서 지갑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포럼에서 반복적으로 나온 또 하나의 키워드는 Super Wallet이었다. 이 개념이 흥미로운 이유는 지갑이 단순히 코인을 보관하는 도구가 아니라, 미래 금융의 핵심 접점으로 재정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온체인 금융에서는 지갑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역할을 맡게 된다.
- 결제와 송금
- 투자, 자산 보관
- 신원 인증
- 계약 실행
- 멤버십 관리
- 토큰화 자산 접근
- AI Agent의 결제 권한 관리
예전 금융에서 계좌가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지갑이 그 자리를 일부 대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사용자가 “블록체인 지갑을 쓰고 있다”고 느끼지 않게 만드는 경험이다. 카카오페이나 토스, 네이버페이 같은 플랫폼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용자는 그냥 원화로 결제한다고 생각하지만, 뒤에서는 스테이블코인 기반 정산이나 온체인 거래가 돌아가는 구조. 아마 대중화는 이런 방식으로 올 가능성이 크다.
사실 대부분의 사용자는 체인, 주소, 가스비, 개인키 같은 개념을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기술이 대중화되려면 기술이 전면에 나서기보다 뒤로 물러나야 한다. 인터넷이 TCP/IP를 몰라도 쓰이듯, 온체인 금융도 "블록체인 같다"는 느낌이 사라질 때 비로소 널리 쓰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경쟁은 단순한 앱 경쟁이 아닐 수 있다. 은행, 카드사, 핀테크, 거래소, 빅테크, 자산운용사, 결제 네트워크, AI 기업이 모두 같은 전쟁터에 들어와 있다. 인프라, 규제 대응, 유동성, 사용자 경험, 지갑 접점이 한데 엮인 종합전이다. 누가 금융회사인지, 누가 기술회사인지 구분하는 일도 점점 덜 중요해질 것 같다.
한국은 늦을 수도 있지만, 잘하면 꽤 강해질 수도 있다
한국 시장을 생각하면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든다. 한편으로는 한국이 이런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꽤 잘 되어 있다는 생각도 든다. 모바일 결제에 익숙한 사용자, 높은 디지털 수용성, 강한 플랫폼 기업, 빠른 서비스 실행력은 분명한 강점이다. 카카오페이, 토스, 네이버페이 같은 플레이어들이 지갑 중심의 금융 경험을 확장해갈 가능성도 충분하다.
반면 규제 속도는 가장 큰 변수다. 미국, 일본, 홍콩이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자산 관련 제도 정비를 빠르게 진행하는 동안 한국은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운 편이다. 신중함 자체는 필요하지만, 인프라 경쟁이 시작된 뒤에 너무 늦게 움직이면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 결제망과 지갑 경쟁에서 후발주자가 될 수 있다.
특히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생태계, AI Agent 결제·정산 인프라, 토큰화 자산 시장 같은 영역은 선점 효과가 클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 부분을 해외 인프라에 의존하게 되면, 사용자 경험은 국내 플랫폼이 제공하더라도 핵심 가치 이동과 정산 구조는 바깥에서 장악할 수도 있다.
반대로 잘 준비하면 기회도 분명하다. 원화 기반 디지털 결제 인프라를 만들고, 국내 플랫폼을 Super Wallet으로 발전시키고, 블록체인 인프라 기업과 금융사가 협업할 수 있다면 한국형 온체인 금융 생태계를 충분히 만들어볼 수 있다. 여기에 K-콘텐츠, 커머스, 게임, AI 서비스가 결합되면 생각보다 강한 시너지가 나올 수도 있다.
인프라의 미래와 투자의 위험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종 모든 디지털자산이 곧바로 유망한 투자 대상인 것처럼 오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포럼에서 오히려 더 분명해진 것은, 미래 인프라로서의 가능성과 개별 자산 투자 위험은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점이다.
스테이블코인, 토큰화 자산, 온체인 정산, 프로그래머블 머니는 분명 중요한 변화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코인 투자에 정당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비트코인조차도 제도권 장기 투자자산으로 편입되는 흐름과 별개로 단기 변동성은 여전히 크다. 알트코인 시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온체인 금융이 커질수록 새로운 리스크도 함께 커진다.
- 규제 리스크
- 준비자산의 신뢰 문제
- 지갑 해킹과 개인키 분실
- 스마트컨트랙트 취약점
- 사용자 경험의 복잡성
- 소수 플랫폼과 발행사로의 중앙화 위험
모두 현실적인 문제다. 기술이 좋아질수록 위험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위험의 형태가 바뀐다는 쪽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개인이든 기업이든 지금 필요한 것은 막연한 낙관보다 구조에 대한 이해다. 스테이블코인이 무엇인지, 지갑과 자기보관이 어떤 의미인지, 스마트컨트랙트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토큰화 자산이 기존 금융상품과 무엇이 다른지 정도는 차분히 익혀둘 필요가 있다. 기업이라면 더 구체적이다. 우리 서비스에 지갑이 필요한지, 스테이블코인 정산이 비용과 속도를 개선하는지, AI Agent가 결제까지 수행하는 구조를 고려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용자에게 복잡한 블록체인 경험을 숨길 수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금융은 더 눈에 띄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할지도 모른다
이번 포럼을 듣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돈이 더 이상 사람이 직접 보내는 대상이 아니라, 조건과 목적에 따라 시스템과 AI가 자동으로 움직이는 인프라가 될 것이다.
이 말은 조금 낯설지만, 곱씹어보면 꽤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보통 금융의 미래를 더 화려한 투자 상품이나 더 빠른 거래 화면으로 상상하지만, 실제 변화는 오히려 금융이 보이지 않게 되는 방향에서 일어날 수 있다. 자동차가 보험과 충전, 정비비 정산을 자동 처리하고, 쇼핑몰이 대출과 환불, 판매자 정산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AI 비서가 예산 안에서 구매와 계약을 수행하는 구조. 그때 금융은 더 이상 독립된 산업이라기보다 모든 서비스 안에 스며든 기능이 된다.
스테이블코인, 프로그래머블 머니, AI Agent 결제, Super Wallet이라는 키워드는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돈을 디지털화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네트워크화하고 자동화하고 서비스 안으로 녹여내는 방향이다. 아마 앞으로의 승자는 가장 복잡한 기술을 가진 곳보다, 가장 자연스럽게 그 복잡함을 감춘 곳일 가능성이 크다.
사용자는 코인을 몰라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뒤에서는 온체인 금융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생각보다 조용하게, 그러나 꽤 깊게 우리 일상으로 들어올 것 같다.